산불 [650085] · MS 2016 (수정됨) · 쪽지

2020-12-18 13:18:00
조회수 3,282

8년만에 만난 수학 가형의 충격(수능 수기)

게시글 주소: https://mclass.orbi.kr/00034001505

어쩌다보니 올해 수능을 보게 된 20대 후반의 틀입니다. 8년만에 수학 가형을 공부하며 느꼈던 점을 얘기하려 합니다.


저는 12학년도 수리 가형 89점, 13학년도 수리 가형 92점을 받았습니다. 둘 다 1컷에 불과한 점수지만 자신감만은 언제나 충만했습니다. 스스로 수학을 잘한다고 생각했습니다. 2020년, 8년만의 공부를 시작할 시점에 제 목표는 수학 한 과목당 1달, 총 3달 안에 1등급 실력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실로 무식해서 용감했습니다.


저는 올해 2월에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하던 가락이 있으니 강의는 필요 없다 판단하고 마플을 사서 바로 기출을 풀었습니다. 수학 1까지는 이 방식이 문제없었습니다. 그러나 미분에 들어선 순간 저는 태어나 느껴본 적 없는 벽을 마주했습니다. 문제가 안 풀리는 건 고사하고 해설지를 봤는데도 이해가 안 되는 경험은 처음이었습니다. 이른바 킬러라는 이름을 가진 괴물과의 첫만남이었습니다. 저의 시절에도 29, 30이 어렵긴 했지만 수학문제가 살인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7데스쯤 박으니 인강을 찾아들을 생각을 하게 됩니다. 1과목에 1달이라는 저의 장밋빛 계획은 봄이 오기도 전에 바스라졌습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저는 상대의 강함을 진정으로 알지는 못했습니다.


4월, 코시국 속에 개강한 지 3주째 되는 어느 날 저는 대학을 다니면서 수능을 준비하기는 불가능함을 직감했습니다. 휴학횟수가 남아있지 않았기에 과감히 자퇴를 했습니다. 허접에도 급이 있는데, 주제 파악도 못하는 폐급 허접이었던 저는 급발진을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당시엔 도전자의 기개라 생각했지만 실은 분별없는 용기였음을 머잖아 저는 깨닫게 됩니다.


5월 모의고사 날, 저는 집에서 가형을 풀어봤습니다. 결과는 60점 4등급. 저는 수레바퀴에 깔린 사마귀가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제 위치를 적나라하게 느꼈습니다. 부끄럽게도 저는 1등급을 받을 줄 알았습니다. 초반 학평 정도는 자이스토리만 풀어도 1등급이 나오는 과목, 그게 제가 기억하는 수학이었습니다. 이 날 저는 현실을 깨닫고 일반 허접으로 승급했습니다.


6월 77점 3등급. 저의 좌절은 극에 달했습니다.

-올해는 불가능하지 않을까...?

-60점보다야 점수가 상승했지만 5개월 안에 수학을 1등급으로 올릴 수 있을까?

자신의 수학적 재능에 의문이 들었습니다. 2월의 호기로웠던 자신감은 남김없이 증발했습니다. 만일 자퇴를 하지 않았더라면 이 시기에 저는 무조건 수능을 포기했을 겁니다. 그러나 날백수가 된 마당에 공부를 계속 하는 것 외에는 방도가 없었습니다.


7월부터 N제를 시작했습니다. 6평의 충격으로 인해 1달 반 동안 수학에만 매진했습니다. 이해원N제, 제헌이, 일격필살, 클라이맥스n제, 문제해결전략, 딥마인드, 4의 규칙, 양가원코드, 드릴 등 커뮤에서 언급되는 N제는 모두 풀었습니다. 이 당시 풀었던 교재들은 제 실력의 큰 자산이 되었지만 1회독으로는 당장의 효과를 보지는 못했습니다.


9월 84점 3등급. 점수는 올랐지만 백분위는 6월과 같은 수준. 저의 불안은 남은 시간과 반비례했습니다.

-수능이 3달이 채 남지 않았다...

-N제를 그리도 많이 풀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리걸음이란 말인가?

실모 시즌이 되었고 저는 유행을 따라 이름난 실모들을 풀었습니다.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처음에는 박살난 점수를 어서 새로운 점수로 갱신하고픈 마음에 실모에 집착했습니다. 그러나 그런다고 점수가 늘지는 않았고 자신감만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모든 실모가 평가원보다 어려웠기에, 저는 과연 실전모의고사는 실전적인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실모는 가끔만 풀고 N제 마무리를 우선시하기로 했습니다.


10월 교육청 모의고사에서 92점으로 1등급을 받은 후 저는 실모에 미련을 버렸습니다. '수능에는 실모처럼 어렵게 나오지 않는다'고 행복회로를 돌리고 그간 푼 교재들의 다회독에 집중했습니다. 이 때 실력이 급상승함을 느꼈습니다. 한 과목의 교재들을 며칠에 걸쳐 1바퀴 돌리고 나면 실력은 단단해져 있었습니다. 쉽게 휘발되지 않았기에 다음 복습까지의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도 있었습니다. 수능이 가까워지자 실모는 쉽다고 알려진 것들만 사들였고, 그마저도 88점 미만을 맞는 순간 나머지 회차는 보지도 않고 버렸습니다.


12월의 수능날 92점. 어느 틀의 고군분투는 1등급 컷에서 멈추었습니다. 귀가하는 택시 안에서 저는 1컷 88을 예상했지만 몇 시간 뒤 92로 잠정확정되는 것을 보고 가형도, 수험생 수준도 징그럽다고 생각했습니다.


8년 전과 동일한 점수지만 제 자신감과 공부량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그 때보다 훨씬 많이 공부하였음에도 간신히 동일한 점수를 받았습니다. 저는 수학을 잘하는 게 아니었음을 배웠습니다. 그저 대학 가는 데 걸림돌이 되진 않을 정도의 수학머리였습니다. 수학강사의 꿈을 접기를 정말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인강계 입성은커녕 동네학원에서 킬러문제에 쩔쩔매고 쪽이나 당하지 않았으면 다행이었을 겁니다. 1등급 끄트머리 인생으로 만족하고 살려합니다.



결론

1.내년 수능을 생각하는 20후 이상의 고령자들은 당장 공부를 시작하세요. 노베라면 기하 추천합니다.

2.이과 수학아 올 한 해 함께 해서 더러웠고 다신 보지 말자


0 XDK (+0)

  1. 유익한 글을 읽었다면 작성자에게 XDK를 선물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