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능이 되고 싶었던 한 사람의 고백
5yrs ago
어느 틈에 추위의 기세는 한풀 꺾였다. 한낮 노한(老寒)은 여전히 손을 깨물 정도지만 손 끝에 만져지는 바람은 한결 시원하구나. 거리 풍경은 닦아낸 듯 투명해져 길바닥에 나앉은 검은 낙엽과의 대비가 선명하다. 도무지 올 것 같지 않았던 30대가 문득 곁에 다가온 지금, 펜을 집어들었다.
친구들이 대학에 다니며 커뮤니케이션 이론을 배우고 공학수학을 배우고 미시경제를 배울 때 난 청소년기의 윤리의식을 암기했다. 한 친구가 실존주의 철학의 계보를 파고들어 교수와 논쟁할 때 나는 데카르트=대륙철학, 아우구스티누스=교부철학이라는 폭력적 명제를 답습했다. 해석이 가능한 논의에 암기의 틀을 덧씌워 강요하는 교과과정에 제법 충실했던 이유는 이것만 끝나고 보자는 내 나름의 결기와 독기가 서려 있음이다.
난 뭐든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한 분야만 파는 것은 흥미 없었다. 설령 한 분야만 판다 하더라도 TOP이 되기는 어렵다. 공부를 예로 들면 누구나 노력하면 서울대 법대(지금은 경영대), 서울대 의대는 갈 수 있을 것이지만 수석은 운도 따라야 하는는 일이다. 또 한 번 1등한다 해서 계속 1등하기도 쉽지 않다. 무엇보다 그런 식으로 1등을 추구할 경우 수성과 추월 사이 받아야 할 고통은 실로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그래서 내 나름의 기준을 정했다. 각 분야에서 상위 1%안에 들자. 그래서 내가 살고 싶은 인생을 한 번 만들어 보겠다고. 대학에 입학하며 카테고리를 크게 정했다. 학업/동아리/대외활동.
그렇다면 학업에서의 상위 1%는 무엇일까. 내 기준에 상위 1%는 백분위가 아니었다. 99%를 내가 듣고 싶은 수업으로만 채우는 작업이 내가 추구하는 상위 1%에 부합했다. 나는 입학하자마자 전공 수업은 내팽개치고 듣고 싶은 수업을 들었다. 디자인 수업, 화성학, 체육 전공, 심지어 생물학 수업까지. 교양이 아닌 전공이었기에 학점은 파토나기 일쑤였다.
정식으로 미술을 전공하지 않은 내가 스케치한대로 조형물을 만들어내기 쉬웠을리 없고 코드 정도만 알던 내가 작곡과 학생들과 이론으로 부딪히는 건 모험이었다. 근데 중요한 것은 내가 그 안에서 가장 많이 배우는 학생이었고 가장 즐거워했던 학생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생각해보라. 당신이 언제 그 치열한 경쟁을 뚫고 이 대학에 입학한 바이올린 전공생들과 바이올린으로 경쟁해 보겠는가. 언제 이런 인적 pool을 만나 음악적 교양을 함양할 수 있겠는가. 학점은 신경쓰지 않았다. C가 나왔을 땐 역시.. 하고 넘겼고 B가 나왔을 땐 십수년 전공한 이들과의 경쟁에서 받아낸 것에 스스로 감복했다.
타과 전공으로 학점이 많이 down grade되었지만 내가 택한 전공에서만큼은 A를 놓치지 않았다. 난 내가 택한 전공 자체가 재미있고 즐거웠기 때문에 매일 관련 서적, 잡지를 읽는 게 취미였고 이런 내게 대학 전공 수업은 솔직히 교양 수업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받은 학점은 3.X.. 누군가에게는 그저 그런 학점이겠지만 내겐 모든 즐거움과 배움의 기쁨이 투영된 숫자다. 정보를 잘 찾았던 덕에 장학금은 제법 받고 다녔다. 높은 학점은 아니지만 사실 괜찮은 전문대학원이나 외국계, 공기업 가기에도 큰 지장은 없다.
다음은 동아리. 수험생 시절부터 동아리를 하면 반드시 공연 동아리에 가입해 백주년기념관에 서겠다는 원칙을 세웠고 다음으로 학회를 하나 이상 만들겠다는 원칙을 세워두었던 터였다. 그리고 그렇게 만든 학회를 반드시 학교내 TOP 명문학회로 키워내는 것, 그게 내게 동아리에 관한 상위 1%에 해당하는 활동이었다. 백주년 기념관에 서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냥 공연 동아리에 가입해 열심히 놀고 즐기며 꾸준히 연습하면 되었다.
학회를 만드는 것은 당연히 어려웠다. 어지간한 영역에는 이미 자칭 '명문학회'들이 줄을 서 있었고 그들 카르텔과 전통을 무너뜨리는 건 필요이상의 에너지를 소요한다. 한 분야에서 하나의 학회 혹은 동아리가 들어섰을 때 그들이 기득권이 되어 신규 주자의 진입을 막는 이 문제의식을 전유해 학우들과 얘기하다 토론학회를 만들게 됐다. 지금 그 토론학회는 3차 면접까지 보며 사람을 까다롭게 고르고 사회대에선 꽤 유명한 학회라 하니 난 스스로 목표를 이뤘다 자위할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대외활동. 역시 르네상스적 인물을 꿈꾸었기에 예술이 빠질 수 없다. 여느 남자가 그렇듯 난 밴드를 하고 싶었다. 사실 처음엔 학내 밴드 동아리에 오디션을 봤지만 가차없이 낙방했다. 괘씸했다. "그깟 동아리 밴드가 나를 떨어트려?"하는 심보도 작용해 그날로 당장 실용음악학원에 등록했다. 그리고 내 기억으로 2년간 한 주도 쉬지 않고 매주 한 두번씩은 연습실에서 홀로 패드를 두들기며 연습했다.
이후 아예 홍대 인디밴드 신에 데뷔했다. 데뷔할 때 나의 원칙은 역시 존재했다. 반드시 앨범을 낼 것, 지상파 방송사에 하나 이상 출연할 것. 여러 밴드에서 활동했고 홍대의 모든 메이저 클럽은 다 돌았던 것 같다. 개인사정상 중간에 탈퇴하게 되었지만 내가 마지막으로 했던 밴드는 지상파 방송 3사에 모든 케이블, 예능을 다 쓸었으니 이만하면 내 목표는 이루어졌다 생각한다.
수험생 시절, 내가 가장 부러웠던 이는 글 잘 쓰는 사람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지적했듯 본디 "글을 잘 쓰는 사람이란 허영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명제에 나도 동의하는 바다. 적당한 허세와 허영을 추구했기에 글쓰기에 매료됐다. 단어를 연구하고 좋아하는 작가의 글을 필사하며 정말 내가 좋아하는 필진의 글은 십년 전까지 거슬러 탐독했다. 그렇게 하나하나 내 것을 만들다 보니 비평대회 수상이 어렵지 않았고 칼럼니스트라는 알량한 타이틀로 포털에 글 연재하는 것도 자연스럽게 됐다. 생각한대로 글쓰지 않고 글쓰는대로 생각하는 경지가 되면 그 사람은 득필(得筆)했다 봐도 좋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가꾸고 싶었던 것은 자신감이었다. 남자로서의 자신감은 결국 외모, 능력, 육체적 강인함에서 나온다고 나는 생각한다. 외모가 바뀔 수 없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항상 웃고 다녔다. 웃는 것은 좋은 인상을 주는데 최적의 무기다. 능력은 쌓으면 된다. 자기 분야에서 노력하면 되기 때문에. 육체적 강인함. 사실 난 강인한 사람들이 좋다. 알도, 케인, 존스, 헌트 남자가 보면 모두 한 번쯤 반할만한 인물들 아니겠는가. 태권도 4단은 사실 아무짝에도 쓸모없었고 복싱, 격투기 도장을 전전하며 피튀겨가며 스파링을 했다. 실제로 피터지게 싸운 적은 없지만 그 때 단련했던 육체적 강인함 덕에 나는 운전하다 시비가 붙었을 때 적어도 상대가 내 앞에서 겁없이 욕을 뱉는 경우를 보지 않아도 되었다.
음악, 글쓰기, 육체적 강인함, 학업, 르네상스적 지식, 외모, 학회 설립 등.. 모든 과정이 내가 바라고자 했던 한 인간상이 되어가기 위한 과정이라 생각했다. 그럼 난 지금 행복할까? 그것은, 물음표다. 왜냐면 내 뜻대로 인생이 되어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요즘은 내가 어릴 적부터 가고 싶었던 바로 그 직장에서 밤새 양복입고 외국인들과 한 회사의 전략을 논하는 그 장면을 연출하고 있지만 사실 내가 하고 싶었던 건 감독이 아닌 딱 배우까지였던 것 같다. 정직원이 아닌 인턴 수준 말이다.
그렇다면 뭘 하고 싶을까? 내가 되고 싶은 인간상은 자명한데 work base로 내가 무엇을 추구하는지 아직 알 수 없다는 게 조금은 미련하게도 느껴진다. 정확히 말하면 알 수 없다기보다 너무 많아서 생긴 고민이다. 전문대학원, 아나운서, 광고AE 모두 합격했지만 기쁨과 동시에 다른 것을 할 수 없었던 아쉬움이 남았던 연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런 과정 속에 난 여전히 어떤 길을 걷고는 있다. 만능이 되고 싶었던 그 수험생의 꿈은 돌이켜보건대 이루어졌다. 난 내가 가진 재능에 충분히 만족한다. 아쉬움이 남으나 후회가 없는 지금 이 상황은 단언컨대 내가 가장 바라던 케이스였다.
그러나 내가 지금 걷는 이 길이 평생 걸어갈 길인지에 대해서는 솔직히 확신도 없을 뿐더러 자신도 없다. 그렇기에 이젠 어느 길을 걸어갈 것인가 명명백백 자문하는 일만 남았다.
이상이 내 인생의 반회갑 끝자락에 남기는 소소한 파편이다.
추신: 이 글을 쓴 이유는 정보를 제공하기 위함도 자랑하기 위함도 아니다. 여자에 관심도 없는 30줄에 접어든 내가 수험생 커뮤니티에서 관심을 받는 게 이문이 남는 장사가 아니란 얘기다. 다만, 이제 대학입학을 앞두고 있는 수험생들 중 분명 나를 닮은 수험생들이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고 이 글은 그런 그들에게 영감을 주기 위해 썼다. Risk-taking을 즐기고 나아가 위기 자체를 즐거움의 동력으로 삼는 허세 가득한 그들은 나와 비슷한 부류이기에 100% 영감을 받을 것이다. 굳이 사족을 더 보태면 내 대학생활을 십분지 일이나마 간결하게 정리해보고조 하는 의도도 포함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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